영화를 보고

기생충_2019 봉준호감독_2

망아지05 2019. 6. 18. 14:08




 영화 기생충_ 두번째 글

 본 글엔 스포일러가 포함될 것임




 이 영화의 화두는

 상이한 사회적 계급이 공존하며 공생할 수 있는가? 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사랑.. 에 관한 이야길 풀어봐야 하지만 후술하겠다.


 기택이 박사장을 죽인 것은 기택에게 있어서의 선(line)인,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존중의 영역을 박사장이 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박사장이 그를 대하는 외적인 태도에 의도성이 있거나 예의를 상실하는 모습을 보인건 아니다.

 엿듣고, 스스로 느끼고, 그 감정을 키워나가고, 숨어서 듣고, 재차 확인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의 결과다.

 인간으로서의 혹은, 대상 그 자체로서의 있는 그대로의 존중.

 존중.

 

 이 영화에 대한 먼저 글에서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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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 대한 존재자체에 대한 인정> -> <상대에 대한 존중> -> <진실된 대화> -> <상호간의 이해> 가 가능해진다.

 상호간 이해의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면 비로소 공감 할 수 있게 되는 접점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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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했다.



 영화의 시작은 반지하에서 밖을 바라본 시점으로 진행된다.

 간신히 들어오는 햇볕을 쬐는 빤 양말이 몇켤레 걸려있고 카메라는 따라내려간다.

 반지하. 습기많고 그늘진.

 그리고 곱등이가 많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아버지인 이기택은 자신이 앉아있는 테이블 앞에 천연덕스럽게 올라와 있는 곱등이를 손가락으로 대수롭지 않게 튕겨낸다.


 영화의 시작지점인 해당 장면에서 배타성을 느꼈다.

 실질적 이해득실을 떠나, 주거편의에 있어 반지하의 삶은 곱등이와도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엔 존중, 이해, 사랑, 연민을 허용치 않는다.

 곱등이가 손가락의 튕김을 당하거나 맞아죽지 않기 위해서는 주거인들의 선을 넘지 않는 딱 그 지점에서 움직이며 살아내야만 한다.

 곱등이와 반지하로 상징되는 주거인들의 주종 혹은 공생이자 곧 기생관계는 역시 반지하의 주거인들의 삶도 같은 맥락에서의 기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로 확장된다.

 (나도 가장 싫어하는 곤충류가 곱등이다. 생긴것, 불결함, 어디로 튈지 모르게 생긴 예측불가형, 도약력, 사람을 겁내지 않는 대담함등)


 숙주와 기생의 관계가 인간의 영역으로 확대된다는 것쯤은 어차피 영화의 주된 서사고 주제이기도 하며 지난 글에도 밝혔기에 조금은 다른 이야길 해 보려고 한다.


 상술했듯 영화는 화두를 던졌다.

<상이한 사회적 계급이 공존하며 공생할 수 있는가?>

 나는 거기에 상호간의 공감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러한 공감을 통한 이해를 위한과정은 필수적으로

<상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 -> <상대에 대한 존중> -> <진실된 대화> -> <상호간의 이해> 의 과정을 따른다고 했다.

 이 과정들이 있게 하는 윤활유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아가페나 에로스적 사랑을 이야기함이 아니라 인간애. 근원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얘기다.

 어쩌면 이 개념은 확장되어 생명애. 생명체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온 자연에 관한 사랑일 수도 있다.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상대에 관한 사랑. 기본적인 애정 없이는 대상에 대한 존재의 인정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손가락으로 곱등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내는 이기택의 모습이나.

 자신의 손과 입을 더럽히지 않고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해고하는 박사장 내외의 모습이나.

 통사정하는 전가정부를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이기택의 처 충숙의 모습이나.

 이 모습들에서 대상에 대한 근원적 존중과 애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화가 던지는 화두.

 상이한 계급간의 상생적 공생은 가능한가? 라고 했을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과연 이 영화는 그러한 기본적 최소한의 인간애라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가가 궁금해졌다.

 (난 글을 쓰는 동시에 생각하고 영화를 되새기기에 기억의 흐름에 맡긴다)


 영화 기생충에서 대상에 대한 존중, 애정 혹은 확장해서 근원적 연민을 확인 할 수 있었던 장면이 있던가.

 기택이 박사장에게 해고당한 운전기사를 걱정하던 장면.

 기정이 지하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문광내외를 걱정하며 음식을 가져다 주려던 장면.

 박사장 내외의 다송에 대한 사랑.

 이기택 내외에게서 확인 할 수 있던 역시 자식에 대한 사랑.

 문광 내외의 사랑과 헌신.


 다혜와 기우의 관계도 있었으나 이것은 근원적 애정이라 보긴 힘든 것 같아 제외.

 이 외 관계에서의 모습들은 모두 배타성과 도구적 형태를 띄고 있었다.


 영화에서도 상호 존중과 이해 공감대 사랑이 있었지만 확인 할 수 있는 대부분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만 작동했고, 기택의 전 운전사에 대한 연민, 기정의 문광 내외에 대한 연민이 그나마 있었던 것 같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며,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게 되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데, 계획이 없으면 실패 할 일도 없을뿐더러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 없게 된다-고 했던 기택의 말. (난 이 기택의 말이 영화의 가장 큰 줄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바닥 끝까지 다다른 그에게도 연민과 사랑은 존재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가난한 자들은 왜 보수정당을 찍을까- 라는 화두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기택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는, 즉 내일이 없는, 즉 미래가 없는 상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내일이라는 미래가 존재할때다.

 그 희망과 실낱같은 비전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 없을만큼 스스로의 주체성과 이성적 판단을 포기하게 된다.

 사회적 규범, 도덕, 윤리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급기야 일탈행위를 일탈행위로서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로까지 나아간다.

 그러한 상태에선 잘사는 것.

 어떻게든 잘 사는 것이 첫째가 된다. 과정은 필요 없다. 그건 계획의 일부고 생존의 문제에서는 일단 살아야 한다.

 살기위해선 과정을 무시하고 일단 잘 살아야만 한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공자왈 맹자왈은 한낱 사치스런 헛소리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롤모델은 결과적 승자가 가장 적합하며, 과정은 모르겠고 일단 걱정 없이 밥먹게 해주고, 경제를 살리겠다는 장담도 공수표 아닌 카리스마있는 결단력으로 인식된다.

 사기를 치든, 공갈협박을 하든, 남의 것을 빼앗든, 어떤 비윤리적 사업을 통해 영리를 취하든 잘 사는 사람이 최고가 된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윗세대는 그런 시대-과정에 관대한-를 살아냈다.

 누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광복과 동족상잔을 거치며 소수 기득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생충의 반지하 일족들보다 더한 시절을 살았다.

 먹는게 중요했고, 자식들에게 먹일게 필요했으며, 자식들은 사람답게 살길 바랬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답게는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이데아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서 자고,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갖는거였다.

 그거면 되었다.


 그들과 그들이 길러낸 자식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시켰다.

 반지하 기생충들의 결과중심주의다.

 거기엔 숙주인 박사장내외의 '아무렴어때'가 기반이 됐고 그런 결과지상주의적 환경조성을 가능케 했다.

 숙주는 기생충들이 치고받던 말던, 그 존재에 대한 인정은 말 할 것도 없고 그저 자기 자신만 아무 탈이 없으면 (선을 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결과지상주의 일꾼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배설물이 정보화와 IT. 유비쿼터스 시대인 지금, 모든 곳에서 빵빵 터지고 있다.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는,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는 지하에서 4년을 넘게 보낸 문광의 남편처럼 환경과 그러한 체제에 순응하게 되고 숙주를 끝없이 존경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박정희를 신처럼 찬양하고 전두환을 카리스마있는 지도자로 인식하는 그 맥락과 닿아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해체되는 강제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가 던진 화두를 확장시켜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돈은 왜 버는 것일까, 행복은 무엇인가.

 

 돈을 왜 버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좀 웃긴 도돌이 표가 되는 광경이 펼쳐진다.

 행복하려고, 그럼 뭐가 행복이냐? 돈잘 버는 것. 하고 싶은거 맘껏 하는것.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면 행복하냐? 그렇다.

 그럼 막 사람죽이고 막 부려먹고 괴롭히고 이런것도 행복에 속하냐? 아니다.

 그럼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행복에 근접한 것인가?


 아마 이쯤으로 귀결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돈을 버는 이유는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할 수 있는 상태를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을 양심, 혹은 신념이라고 보고. 그것을 대체로 보편적 선에 기반한 것이라 하자.

 다시.

 돈을 버는 이유는 양심대로 행할 수 있는 상태를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돈때문에 양심(인간성)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렇다.

 삶을 살아내며 우린 수 많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들 중에서 가끔은 양심에 반하는 선택이지만 현실적 이해관계나 이해득실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대적으로 나쁜 선택(양심에 반하는)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해, 반지하의 기생충가족과 같은 상황에 처해진다면.

 그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생, 그 연속적 선택에서 현실과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상대적으로 나쁜 선택을 하게 될테고, 그 영향은 사회전반에 미쳐, 결국은 규칙과 규범과 윤리의 경계가 허물어진 결과주의가 최고로 칭송받는 상태가 될 것이다.

 다시.

 그렇다면 돈을 버는 이유는 언제 어느때고 내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이든간에, 내 양심대로 선택하고 행 할 수 있게 하는 하드웨어적 기반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그래 그거면 되는거다.

 로또는 다음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