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김-에 대한 이슈가 뜨겁고 절정에 달해있다.
이 글은 그 시비나, 정치적 내용,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와 관련한 내용이 아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에 담긴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엄마야" 라고 시작하는 유투브 동영상을 보았다.
그녀의 조카로 추정되는 대상과의 전화통화였다.
내용에 대한 이야긴 차치하고.
그녀는 조카에게 여러번 반복해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집안 어른인데, 청소하는 아줌마 한테도 하지 않을 소리를 하느냐"
"청소 하는 아줌마도 아니고"
"노숙자한테도 할 수 없는 매너를 가지고 있니"
"내가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아줌마야"
위 표현을 들으며, 내 언어습관을 돌이켜보았다.
최근엔 잘 쓰지 않았지만 내가 사용했던 비슷한 표현으론 "지나가던 개한테도 안그러겠다" 정도가 기억났다.
상대에게 바라는 예우, 예의, 존중의 범위가 내겐 거기까지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보편적 기준에서 도덕적 평등의 대상범위를 어디까지 인식하느냐.
반대로, 도덕적배제의 범위를 어디까지 기준하고 있느냐.
김혜경의 그런 발언은.
상대에게 바라는 도덕적 예우에 있어.
자신과 청소하는 아줌마는 다를 수 있다. 거나, 노숙자와 나는 다를 수 있다.
라는 전제를 깔고 얘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장면과 유사한 사례는 많이 있다.
얼마 전이던가.. 이언주 국회의원의 통화 녹취록이 수면에 올라 이슈가 된적이 있다.
그녀는 "조리사라는게 별게 아니다. 그 아줌마들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다. 옛날같으면 그냥 조금만 교육시켜서 시키면 되는거다"
"밥하는 아줌마들"
의 표현들이 문제가 되었다.
김혜경이란 사람의 세계관에선
청소하는 아줌마나 노숙자가 자신과 달리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계급 인식을 가졌고.
이언주란 사람의 세계관에선
동네아줌마나 밥하는 아줌마, 조리사들이 자신과 다른 계급을 가진 존재라는 세계관을 보여준 것이다.
아이러니 한 지점이 있다.
정치, 특히 정당정치라는 것은 연대를 필요로 한다.
연대가 가능키 위해선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은 상호 설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고.
설득이나 이해는 소통과 교류를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위 발언내용은 인간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인간은 불평등한게 맞다.
불평등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좁혀 나가기 위한 캐치프라이즈를 내걸고서 정치를 하는 이들(혹은 그 측근)이라면
사유의 밑바탕, 그들 세계관에 있어 계급차별적 인식을 가진것을 내보인 해당 발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역할의 본질에 있어 그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불평등한 차별적 인식을 세계관으로 가진 이들이 겉으로 평등을 이야기하고 옳음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저열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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